부활절 논쟁
부활절 논쟁은 파스카 논쟁 (유월절 논쟁)을 신학자들이 부르는 말이다. 그들은 '서방 교회는 성력 1월 14일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켰으나 동방 교회는 성력 1월 14일에 부활절을 지켰기 때문에 파스카 논쟁이 발발했다'며 파스카 논쟁을 부활절 날짜 논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힘입어 논쟁에서 승리한 서방 교회의 입장에서 교회사를 기록했기 때문이며 실제와는 다르다. 파스카 논쟁은 사실 부활절 논쟁이 아니라 유월절 논쟁이다. 당시 논쟁의 초점이 유월절 성찬식을 행하는 날짜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파스카(πασχα)라는 단어도 헬라어로 '부활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 곧 '유월절'이라는 뜻이다.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난받기 전날인 유월절의 만찬석에서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약속하며 새 언약을 세웠다. 이에 초대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을 따라,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인 성력 1월 14일에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며 성찬식을 거행했다.[1] 그러나 2-3세기경 로마교회(로마가톨릭교회)로 대표되는 서방 교회가 그 날짜를 변질시켜 유월절 성찬식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하기 시작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인데도 엉뚱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에 행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에 유월절 성찬식 날짜를 놓고 촉발된 논쟁이 파스카 논쟁(유월절 논쟁)이다. 동방 교회의 감독 폴리캅(폴리카르포스)과 폴리크라테스는 모두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본을 따라 성력 1월 14일에 성찬식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월절 성찬식 날짜에 대한 동·서방 교회의 논쟁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종결되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한 이 회의에서 서방 교회의 주장대로 성찬식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행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성경적 유월절이 폐지되고, 부활절 날짜도 '춘분 후 보름달이 지난 다음의 첫 번째 일요일'로 결정됐다. 이후 성력 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은 '십사일파'로 불리며 이단으로 낙인찍혀 점차 사라져 갔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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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유월절 밤]에 ...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 파스카 논쟁. 《passoveris.com》.
- ↑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passoveris.com》.